곧 6·25다. 수십년 전 학창 시절의 표어가 생각난다. 상기하자 6·25!
6·25전쟁은 신종 속어를 낳기도 했다. ‘골로 간다’가 그것이었다. 6·25 전쟁 이후 흔히들 ‘골로 간다’고 하면 죽으러 가는 것과 같은 의미로 통했다. 한 인간의 죽음을 ‘골로 갔다’고 상스럽게 표현하기도 했다.
전쟁 와중에 선량한 양민들은 곧잘 총칼의 위협 속에 산 속 골짜기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억울한 죽음으로 내몰리곤 했다. 한마디로 골짜기로 끌려 가는 것은 학살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골(짜기)로 간다’는 것은 곧 ‘개죽음’과 같은 의미로 통용됐다.
언어는 시대를 반영한다. 그런 면에서 시대의 아픔을 담은 언어를 만나면 가슴이 아프다. 특히 이처럼 전쟁이 낳은 가슴 아픈 단어들은 더욱 그렇다.
전쟁은 슬픔도 낳지만 ‘영웅’도 출산한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영웅들은 누구인가. 방송이나 신문에서는 ‘세계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100인’이나 ‘한국을 움직이는 50인’ 같은 식으로 보도하며 현대의 영웅을 생산해내기도 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과 같은 ‘정보 시대’에는 영웅을 탄생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현대 매스컴은 운동 선수에게조차 ‘영웅’이란 칭호를 붙이는 데 인색하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영웅의 대량생산 시대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현대가 영웅이 빈약한 시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영웅은 아무래도 전쟁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바친 6·25 전쟁영웅들이 있다. 물론 전쟁에서 살아 남은 영웅도 있다.
6·25 전쟁이 낳은 공군의 영웅들은 누구일까. 이 대목에서 국방부가 발간한 ‘한국전쟁사’ 개정판 제2권 675쪽을 한번 보자.
“15일 08시25분에 기지를 이륙한 세대의 F-51 전투기 제2편대는 편대장 옥만호 대위(2번기 유치곤 중위, 3번기 박재호 대위)의 선두 지휘로 평양 동쪽 상공에서 폭탄 6발을 투하하고 로켓탄 12발과 기총 2500발로써 그 일대에 있는 포진지와 보급품 집적소 3개소를 폭파하는 한편 평양 동쪽 16킬로미터에 있는 승호리 철교 2개의 경간을 폭파했다.
또 전투기 제1편대도 윤웅열 대위의 지휘로 승호리 상공에 출격하여 폭탄 6발과 로켓탄 8발을 투하하고 건물 1동을 소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벙커 3개소를 폭파했으며 승호리 철교 2개의 경간을 완파하여 사용불능토록 만들어 놓았다.”
바로 한국 공군의 영웅들이 1952년 1월15일, 공군의 F-51 전투기 여섯 대가 평양 근교의 승호리 철교를 폭파했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다. 승호리 철교 폭파는 앞서 미 제5공군이 연 500회나 출격해 공격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던 터였다.
지금까지도 기적으로 통하고 있는 승호리 철교 폭파는 우리 공군 조종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사의 출격을 통해 이뤄진 성과였다. 한국 공군 조종사들은 미 공군이 제트기로도 해내지 못한 것을 프로펠러기를 몰고 성공시킨 것이다.
<6.25전쟁당시 100회 출격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고 있는 옥만호 전 공군총장>
‘승호리 철교의 영웅’ 옥만호 대위는 제12대 공군참모총장까지 역임하고 향년 87세의 나이로 최근 작고했다. 그는 공군 대장으로 예편한 뒤 외국 대사와 국회의원까지 지냈으니 성공한 영웅이었다고 하겠다.
6·25에서는 살아남은 영웅 보다는 장렬하게 공중에서 산화한 ‘하늘의 영웅’들이 더 많이 나왔다. 그 가운데는 고성 상공에서 유성처럼 사라졌다가 나중에 보라매의 요람인 공군사관학교 교정에 동상이 세워져 있는 임택순 중위(전사한 뒤 대위로 추서) 같은 이들도 있지만 일본 항공학교를 졸업한 조종사들도 꽤 있었다.
1950년 7월 2일 경부국도로 출격, 시흥 상공에서 적 탱크 부대를 격파하다 장렬히 자폭한 이근석 대령(전사후 준장 추서)의 경우는 일본군 에이스 출신이었다. 일본의 카미타니 소년항공학교 출신인 그가 에이스였다는 것은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기를 5대 이상 격추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이러니컬하게 ‘공군 창설 7인 간부’ 중 한명이었던 그는 ‘어제의 적’이었던 미군으로부터 일본 이다츠케 기지에서 일주일간의 훈련을 받고 인계받은 미 공군의 고물 전투기 F-51를 타고 출격했다.
원산지구 폭격에서 산화한 신철수 대위와 진남포 상공에서 전사한 나창준 대위, 간성지구에서 하늘의 넋이 된 박두원 중위 등은 일본 다치아라이 육군비행학교 출신이었다. 이천에서 적진 한가운데로 돌진한 이세영 대위도 일본군 소년 항공병 출신이었다.
이들은 비록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서 비행술을 익혔지만 신생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젊은 청춘을 기꺼이 바친 것이다.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데는 출신이나 계급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6·25 전쟁의 승자는 미국도 남한도 북한도 중국도 소련도 아니었다. 삼천리 강산을 초토화한 3년 전쟁 후 그나마 반쪽 땅이라도 비공산권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을 지킨 영웅들의 희생이 조금이라도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조국 산하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영웅들은 숱하다. 그래서 정부는 전쟁이 끝난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훈장 찾아주기’ 운동을 벌이고 군 부대에서 노병들을 초청해 군악대의 연주 아래 훈장을 수여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이 과정에서 잡음도 인 적이 있었다. 군이 행정상 편의를 위해 6·25 참전 노병에게 훈장을 택배로 배달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나의 노력으로 바로 잡혀 이제는 군 초청 행사를 통해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호국보훈의 달, 창공에 넋을 뿌린 이들을 포함해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면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다시 한번 여미게 된다. 이땅에 다시는 ‘골로 가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들의 희생은 더욱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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