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이 창군 이래 처음으로 선발하는 여성 학군장교(ROTC) 지원서를 접수한 결과, 전체 60명 모집에 360명이 지원해 6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지원자가 가장 많이 몰린 명지대의 경우에는 경쟁률이 무려 10.6대1에 달했다.
최종 합격자 60명의 명단이 11월 30일 발표되면 이들은 2013년 첫 여성 ROTC 장교로 임관하게 된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1962년 5월 국방부는 ‘제1회 미스 여군 선발대회’를 육군본부 강당에서 열었다. 이 대회에는 육군 여군대대와 여군훈련소 등에서 서류심사 등을 통해 선발된 총 7명이 출전했다. 여기서 뽑힌 미스 여군 진·선·미는 같은해 6월16일 열린 미스 서울 특별예선대회에 참가했다.
미스 여군 선발대회 절차는 야외복(드레스)과 수용복 심사까지 있는 등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와 비슷했다. 다만 군복 심사가 있었다는 것이 미스 코리아 대회와 다른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었다.
당시 일간지에도 미스 여군 선발대회의 결과가 실렸다. 동아일보는 1964년 대회에서 예선을 거쳐 올라온 11명의 후보자 간운데 진에 김명자 하사, 선에 이춘자 상병, 미에 김연순 중위가 선발됐다고 이들의 사진과 함께 보도하기도 했다.
▶ <1970년 9월3일 여군창설 20주년 기념행사를 병행한
미스 여군 선발대회 수영복 심사장면. 사진/국방일보>
그러나 미스 여군 선발대회가 미스 코리아 대회의 여군 예선대회처럼 운영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군 당국은 1968년 대회부터는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 출전이 목표가 아닌 용모와 품행이 단정한 모범여군을 선발하는데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으나 결국 반대 여론에 밀려 미스 여군 선발대회는 1972년 대회를 끝으로 폐지됐다. 1, 2, 3등의 명칭을 ‘진·선·미’가 아닌 ‘용·지·미’로 바꾸는 등 나름 많은 노력을 했으나 허사였다.
군이 미스 여군 선발대회를 개최한 가장 큰 이유는 여군 모집을 위한 홍보 차원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군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달라도 많이 다른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하나의 전문 직업인으로서 여군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주역의 대가이신 대산 김석진 옹도 “지금은 정신보다 물질, 동양보다 서양, 남자보다 여자, 아버지보다 자식이 앞서는 ‘음(陰)’의 시대”라고 지적했다. 여군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이해가 간다.
조금 샛길로 빠지는 얘기지만, 대기업 임원으로 있는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요즘 남자 신입사원 중에는 좌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보는 선수들도 있다고 한다. 볼일을 본 후 변기 주변에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엄마한테 어렸을 적부터 훈련받은 결과라는 것이다. 아뭏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 ‘남자는 입석, 여자는 좌석’이란 불문율도 깨져가고 있다.
이는 남자 바지의 앞단추 또는 지퍼가 갖고 있는 ‘생리작용을 위한 편리 기능’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듯 하다. 남성들이 소변을 볼 때 ‘꽈배기’처럼 틀어져서 나오는 생식기를 쉽게 꺼내기 위한 앞단추와 지퍼의 기능이 필요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입고 벗을 때 편하기 위한 이완(弛緩)의 기능만 남겨지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는 과거의 상식으로 남녀간의 차이를 살피면 곤란하다는 것을 엉뚱한 바지 단추의 예까지 꺼내가면서 전했다.
거두절미하고 분명한 점은 이제 한국군은 남자만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군은 남녀 혼성군이다. 미스 여군 선발대회까지 열어 가면서 여군을 모집하려 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상전벽해의 변화를 거쳤다. 여군의 위상은 그만큼 높아졌다. 여성 입장에서는 위상이 높아진 게 아니라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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