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기습 폭격 당일의 생생한 장면이 장병들의 수기 속에 살아났다.
해병대해병대사령부는 연평부대 장병들의 전투 상황 수기를 종합해 책으로 엮을 예정이다.
이 수기에는 최초 포격을 받고 즉각 대응사격한 포 7중대 장병들의 생생한 모습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또 전사상자 치료와 후송을 담당한 의무실의 처절했던 당시의 장면도 목격할 수 있다.
해병대 사령부는 지난 11월 23일에 있었던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장병들의 수기를 1차적으로 종합하였다. 현재까지 종합한 수기는 초고 상태이지만 당시 긴박했던 상황이 진솔한 언어로 꾸밈없이 담겨져 있다. 그 중에서 일부 장병(12명)의 수기내용을 공개했다.
1차 수기는 즉각 대응사격에 임했던 포 7중대 장병들과 전사상자 치료와 후송을 담당했던 의무실, 포탄이 집중적으로 낙하된 본부지역의 장병을 대상으로 종합하였고, 현 상황이 마무리 되는대로 나머지 장병들의 수기도 종합하여 수기집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당시 K-9 대응사격을 지휘했던 7중대장 김정수 대위는 “적의 기습 포격으로 타격을 받은 중대가 목숨을 걸고 서로 챙겨가며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임무를 수행해 준 중대원들이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다. 적이 추가도발 한다면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쓰고 있다.
적의 피격을 받고 귀 옆을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는 가운데서도 포반원들을 신속히 대피시키고, 자동사격이 불가하자 수동으로 사격에 가담했던 3포반장 김영복 하사는 “맞고만 당할 수 없어 억울하고 분노에 차올라서 신속히 탄을 준비하여 반자동임무로 사격에 가담했다”고 밝히며, “솔직히 무섭기도 했지만 포반원을 살리고 싶었다”고 썼다.
3포 사수인 정병문 병장은 적의 포격이 포상에 떨어졌을 때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포 안으로 서로 대피시키며 “다른 포반의 사격에 우리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수동으로 방열하여 사격을 실시했다”고 하며, “당황하지 않고 멋지게 대응했다”고 밝혔다.
조종병인 박태민 상병은 휴가를 출발하려다가 적의 포격이 발생하자 숨이 차게 뛰어 복귀하여 휴지통으로 물을 퍼 날라 화재 진압을 도왔고, 허겁지겁 자신을 찾아 무사한 모습을 보고 포옹해준 포반장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평도 포격 당시 연평도 소속 장병 중에는 2명의 전사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었다. 당시에 이들은 모두 의무실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은 후 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의무실 주변에는 11발의 적 포탄이 떨어지는 절대적인 위기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의무실에서는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의무실에 소속한 이재선 하사는 “당시 의무실은 드라마에서 보던 처참한 전쟁 현장이었고, 부상당한 해병의 환부를 찾아 군화를 벗겨보니 담겨있던 피가 쏟아졌다.”고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적고 있다. 그는 2차 폭격으로 다시 대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대피하지 않고 환자의 손을 잡아주고 있던 한 해병의 모습도 기록하고 있다.
연평도에서부터 환자를 후송하며 수도통합병원까지 다녀온 의무병 윤성문 이병은 “(수도통합)병원 로비에서 본 환자 가족들의 모습은 너무도 슬퍼보였고, 그분들에게 미안하다고 느꼈다.”고 쓰고 있다. 문 이병은 “우리가 더 강해져야 북한의 위협을 안 받고 우리 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밝히고 있다.
전입한 지 3개월이 되었다는 의무병 강병욱 이병은 적의 1차 포격이 있은 후 의무실은 환자들로 가득 찼고, 포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나도) 살고 싶었지만 환자를 살려야한다는 마음에 모두 대피하라는 방송도 무시한 채 환자를 치료했다.”고 밝히고 있다. 강 이병은 “환자 후송을 위해 들 것을 창고에서 들고 와야 할 때는 싫었지만 발은 벌써 창고 쪽으로 가고 있었다.”며 당시의 심정을 기록했다. 하얀 천으로 덮여 있는 문광욱 일병을 앰뷸런스에 실을 때는 그를 살리지 못해 죄송했다.”고 당시의 참담했던 마음을 기록했다.
의무실에서 피로 얼룩진 부상자의 손을 잡고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하승원 대위(목사)와 긴박한 상황에서 모두를 대피시켰으나 근무에 진입했던 3명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애를 태웠던 한훈석 상사, 포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군종목사와 함께 화재 진압에 몸을 던졌던 백종협 병장의 모습 등 본부지역의 사연들도 담겨있다.
민간인을 살리고, 후송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던 인사팀의 당시 모습은 인사과 안준오 중사의 수기에서 볼 수 있다. 연평어린이집의 유아들과 교사들을 대피시키고, 대피시설에 긴급물자를 파악하여 지급하며, 주민들을 섬에서 대피시킬 때는 불이 켜진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대피시킨 그들은 “우리는 포격의 순간에 최소한 자신의 안녕을 위해 자세를 숙이지는 않았다.”며, “전투 현장에는 사기충천한 연평부대원이, 불타는 마을에는 인사팀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기상반장 신용한 중사의 수기에는 1차 포격 도발 당시 K-9 자주포 포상을 촬영한 정훈장교의 긴박했던 상황도 묘사되고 있다.
해병대사령부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의 전투상황을 기록한 수기를 종합하여 책으로 엮어 장병 교육용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장병들의 연평도 포격 도발 전투상황 수기 전문 (12명) >
■제7포병중대장 대위 김정수
2010년 11월 23일 여느 때처럼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소연평을 바라봤었다. 아침 해가 아직 뜨지 않았지만 동이 트는 모습에 오늘 사격이 정상적으로 실시될 것을 알았다. 드디어 오후가 되어 사격이 시작되었고 준비한데로 2문은 사격에 미참가하고 혹시 모를 적의 도발에 대비하여 사격태세를 유지한 채 4문이 사격을 실시했다. 또한 다른 모든 중대원은 각자 임무수행 위치에서 대기하였고, 사격은 절차에 의해 정확히 진행되고 맑은 하늘에 한 가닥 선을 그리며 정확히 표적 위치에 명중했다.
2개 관측반 모두 명중을 통보하고 ATT 우승을 확신하며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던 중 4포에서 안전 통제관 역할을 수행하던 포술담당으로부터 격발 불량을 보고 받고 천천히 불발탄 처리절차를 시행 하라고 지시를 했다. 다른 모든 포반은 4포가 사격이 끝날 때까지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중 쾅! 하는 파열음이 들렸고 상황실에 있던 모든 대원은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다 판단하고 1층으로 올라가 포상을 바라봤다. 바로 눈앞에는 연병장을 지나 방음벽 틈으로 2포의 모습이 보이고 까만 연기가 중대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주둔지 주변과 마을까지 포탄이 파열하는 모습이 보였고 여기저기서 화염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신속히 상황실로 들어가 중대 소산과 방독면 착용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부대장님께 주둔지 포탄 낙하 상황을 보고하고 장비 소산을 시키겠다고 건의했다.
부대장님은 신속히 소산을 지시하셨고 나는 행정관과 포술담당, 정비담당에게 상황파악과 피해현황을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포반의 소산완료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다시 상황실 밖의 상황을 살폈다. 연기의 색깔이나 아무런 냄새가 없었다. 다시 상황실로 내려와 방독면 해제를 지시했을 때 부대장님의 사격준비 지시 명령이 내려왔다.
포탄이 낙하되는 상황에서 즉각 사격준비를 지시했다. 우리 중대원들은 차분하면서 대담하게 사격을 준비했고 6포, 5포가 사격준비 완료 보고를 했다. 6포는 얼마나 화가 났던지 3번이나 “사격 준비 끝!”을 외쳤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적의 기습포격으로 피해 상황이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아 우선 준비되는 대로 부대장님께 보고를 했고 잠시 대기하라는 동안 2포가 사격준비가 끝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내 눈으로 본 2포의 모습은 분명히 큰 부상을 입었거나 장비파괴로 임무가 불가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2포가 우렁찬 목소리로 사격준비 끝을 외칠 때 고마움과 자신감이 넘쳐났다. 그래서 부대장님께 3문이 사격준비가 끝났다고 정정보고를 하였고 부대장님은 “사격해!” 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셨다.
그리고 사격을 하는 도중 통신이 되지 않는 1포와 3포는 유선 복구조를 투입시켰다. 언제 어디서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전명준 병장은 두려움 없이 바로 달려가 포반의 유선을 개통시켰고 화염에 휩싸인 1포 인원들을 포 밖으로 유도했다.
첫 번째로 적을 향해 사격을 하는 우리는 긴장감 보다는 자신감에 찬 모습이었고 적의 기습에도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침착하게 소산을 하고 다시 사격준비를 해서 대응을 한 것이었다. 사격 중에 4포로부터 3포에 부상자가 있는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고 20발을 더 사격하라는 부대장님의 지시가 이어지고 또다시 재타격을 실시했다.
그러던 중 행정관으로부터 3포 인원이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고 1포 화재가 크다는 보고를 받아 1포는 즉각 화재를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잠시 후 3포로부터 무전을 받았다. 3포 반장의 목소리였다. “수동으로 사격임무에 가담하겠다”는 보고였다. 나는 환자를 파악했고 “모두 이상 없습니다.”라는 포반장의 보고에 더 힘이 나고 고마웠다. 그리고 적의 2차 사격이 있었고 포병 레이더로부터 사격요구가 들어왔다. 우리를 포격한 적을 찾아낸 것이었다.
나는 바로 표적전이를 지시하고 다시 사격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4문이 사격에 가담하게 되었고 또다시 포탄이 떨어지는 중에 3차 사격을 실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적 포탄에 의해 갑자기 정전이 되었고 통신이며 포대 통제기이며 작동이 되지 않는 암흑 속에서 상황실 인원들은 비상조명을 켰다. 나는 신속히 비상 발전기를 가동하도록 지시했고 적 포탄이 비산하는 가운데도 김영훈 상병은 발전기를 가동시켰다. 다행히 발전기가 가동되고 모든 장비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사격 끝!” 보고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조용한 가운데 나는 상황실에서 올라와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저기 화재로 인해 검은 연기와 화염으로 뒤덮히고 간부들과 중대 본부의 해병들은 병사에서 소방호스를 모조리 끌어 연결해서 1포상의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다. 또한 추가적인 포격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포반원들은 계속해서 사격준비태세를 유지토록 지시하였고 나머지 병력들도 계속해서 탄약고 주변과 포상 주변의 화재를 진압하며 포반의 피해사항을 보고 받고 추가 도발에 대비했다.
갑작스런 적의 기습 포격으로 선제 타격을 받은 중대가 적의 포탄에 목숨을 걸고 개인의 임무에 충실하고 상·하간에 서로를 챙겨가며 긴박한 상황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임무를 수행해 준 중대원! 우리 해병들이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살아줘서 고맙다.
우리는 단 한명의 인명피해도 없이 이렇게 건재하며 평소 우리가 외치던 ‘대한민국 국가대표 포병중대’라는 자부심을 더욱 실감하였고 우리의 영토와 국민에게 해를 끼친 북괴군에 대한 적개심은 중대장인 나를 비롯해 중대원 모두가 하늘을 찌르고 적이 추가 도발한다면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제7포병중대 3포반장 하사 김영복
금일에 평가 ATT평가 사격이 계획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전부터 사격준비 및 사격대비 비사격 임무를 실시하였다. 오후 13시 30분부터 평가사격이 되었고, 초탄은 우리 3포가 수정임무 사격을 실시하였다. 마지막 사격을 실시하는 도중에 4포가 불발이 나서 FDC에 불발보고를 하였다.그때 우리 포반은 사격이 다 끝나서 기상반장이 수고했다고 마무리 잘하라는 말을 하고 4포로 이동 후에 전장정리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우리 포반에“쾅”하면서 포탄이 떨어졌다. 그래서 일단 밖에서 격발기를 정리하고 있는 김진혁 일병을 포 내부로 들어오라고 지시하고 포반원들에게 엎드리라고 지시를 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사격이 막 끝나고 해치들이 모두 열려 있는 상태에서 파편들이 위에서 떨어지고 옆에서 들어오고 뒤에서도 들어오고 있었는데 귀 옆에 파편을 맞아 피가 나고 있었고 상병 임진규에게 상단 해치와 측면 해치를 닫으라고 지시를 하였다. 그리고 해치를 모두 닫고 나서 포반원들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며 환자를 파악하였고, 포반원 모두 무사해서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천만다행이면서 하늘에 감사했다.
그리고 나서 장비를 살펴보았는데 전시기에 고장코드에 불이 들어와서 확인을 해보니 구동제어기에 불량 코드가 보였다. 그래서 이대로는 포기할 수가 없어서 일단 장비를 소산시키고 정확히 장비를 재점검하고 자동은 불가하여 반자동으로 사격을 실시하겠다고 중대장님에게 보고를 하였다.
맞고만 당할 수 없어 억울하고 분노에 차올라서 포반들과 신속히 탄과 장약을 준비하여 전방포상에 나가서 반자동임무로 3차 사격에 가담하여 사격을 실시하였다.
솔직히 무섭기도 했지만 우리 3포 포반원들을 살리고 싶었고 우리 포반원들이 있어 살 수 있었고 우리 포반원들에게 정말 감사하고 영원히 잊지 못할 2010년 11월 23일이 될 것이다.
적 포탄이 낙하 되어도 우리 중대는 각 직책별로 임무수행을 하였고, 한 명도 다치는 인원이 없어 하늘에 감사하다. 기준포 3포는 절대 죽지는 않는다 한 번 더 적 포탄이 날아오는 순간 강력한 대응을 하여 북한을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제7포병중대 3포 사수 병장 정병문
훈련이 끝나서 한결 수월한 기분으로 포 정리를 하고 있었다. 기준 3포로서 아쉽게 늦게 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수입을 하던 도중 타 중대 사격소리인가 하는 포성소리가 들렸다. 우린 정리를 하며 서로 격려의 말을 주고받으며 4포가 불발탄 처리절차를 잘 해야 할텐데 하며 아쉬운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무언가 점점 커지는 포성소리에 3포반장님과 그 짧은 시간에 눈이 마주쳤고 반장님 외치는 소리와 동시에 쉬우웅 팡...
귀에선 아무소리도 나지 않았다. 반장님은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뭐라고 외치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귀에선 둥! 둥! 둥! 하는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에선 불이 붙어 화끈화끈 거리고... 포반원들을 모두 안쪽으로 집어넣는 반장님과 반장님을 잡아 포안으로 대피시키려는 내 모습뿐이었다.
지원길 병장도 내가 걱정됐는지 포 안쪽으로 당겨줬고 청각 장애인들 마냥 반장님 손짓으로만 지시를 따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천만 다행으로 모든 해치가 열려있는 상태에서 파편이 우리를 다치게 하지는 못했고...
우린 귀가 돌아오는 순간 유선망을 복구하고 무전기를 잡았다. 급히 3포를 부르는 목소리... 우린 거기에 응답을 했고 바로 상위직책임무 실시하라는 명령에 우린 사격준비를 했다.
전시기는 고장이나 포가 잠기지 않아... 시간이 조금 걸렸고 급히 소산을 해 있던 우리... 전시기 고장으로 사격 불가라고 보고는 했지만 다른 포반들이 사격하는 소리에 우리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한편으로 우리 기준 3포가 강하다는 걸 모두에게 적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도 수동으로 방열하여 사격을 실시했다. 정말 이래서 해병대가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 똘똘 뭉쳐 평소에 담당관님한테 다그치며 연습하는 훈련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멍하니 있지 않고 한발이라도 더 쏴서 이 북괴군들을 다 쏴 죽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포반은 정말 실력 좋은 아이들과 반장님이 함께라서 당황하지 않고 멋지게 대응을 했다.
난 잊지 못한다. 이 일을. 이건 돈 주고도 못 살 값진 경험이자 전우애를 느꼈다. 모두를 기억할 것이고 모두들 건강하게 있어줘서 고맙다. 덕분에 그나마 맘 편하게 전역하는 거 같다. 내가 아는 한 중대장님을 포함한 포7중대 인원들은 사나이 중의 사나이들이다.!
포7중대 파이팅!
■제7포병중대 자주포 조종병 상병 박태민
순식간에 건물들이 날라 다니고 이곳, 저곳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민간인들은 도망치란 소리에 일사분란하게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고, 사격하는 중대마다 전화를 받지 않고, 북한쪽에서 쏜 실상황이라는 걸 듣고 휴가자들은 콤비를 타고 당섬 분초로 일단 대피해 있다가 휴가자들 각 중대로 복귀하라는 전화를 받고 콤비를 탔는데 중대와는 거리가 있는 곳에서 포7중대는 여기서 가라고 했다.
처음에 당섬 분초로 대피하면서 우리 중대 위치를 제일 먼저 확인 했는데. 검은 연기와 불이 나고 있어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내리자마자 중대로 뛰어가는데 어느 정도 뛰니깐 숨도 심하게 차고 코도 따갑고 해서 걷고 뛰고 반복하면서 중대 위병소에 들어서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포상 쪽과 주변 산에서는 불이 나고 있었고, 건물 안으로 들어오니 식당 쪽 천장이 무너져 있었다. 상황실로 바로 가보니 중대장님은 분주하게 사격을 지시하고 계셨다.
그러다 잠깐 틈을 타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불 끄는 곳으로 가서 호스를 가져오고 물이 나오지 않아 휴지통 등을 이용해 물을 퍼 나르다가 어느 정도까지 진압을 했지만 산 쪽에는 계속 불이 번지고 참으로 비참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상황실로 내려가 있는데 하나포 반장님이 허겁지겁 내려와 날 찾더니, 포옹을 하였다. 그리고 반장님과 같이 포로 뛰어 올라가 임무수행을 하였다.
■의무실 예방의학담당 하사 이재선
23일 아침 어느 때와 다름없이 관사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나와 같은 버스를 타고 가는 선후임들에게 인사를 하며 시작하였다. 부대에 도착하고 나서도 어느 때와도 하나 다름없이 평화롭다면 평화롭고 계획된 일과가 진행되었다. 그날 오후 우리 부대 사격훈련이 시작되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몇 발을 사격하였는지 세어보면서 북한의 연평도 도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지는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그 순간 우리 부대가 사격하는 소리가 아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다른 느낌의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당황도 잠시 당시 행정관님의(상사 송영복) ‘엎드려’란 소리에 모두 엎드려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어리둥절해 하며 단지 오발이라고만 생각하였고 정확한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을 때 또 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앞산에 폭발이 일어났고 진동이 느껴졌다.
행정관님의 ‘실전상황이야 뭐야’라는 말에 ‘실제 상황인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주변상황을 살필 시간도 없이 북한의 무차별한 폭격을 계속되었고 1차 폭격이 끝나고 서둘러 의무실로 복귀하였으나 항상 평화롭고 우리가 집처럼 생각하던 의무실은 폭격에 따른 파편으로 수십 장의 창문이 깨져있었다.
현실을 느낄 새도 없이 환자가 발생하였다는 연락이 왔고 정비소대 하사와 수색팀장이 환자가 발생하였다고 올라왔다. 안내에 따라 환자발생지역으로 치과군의관님을 비롯한 나와 몇 명의 대원들은 들것을 들고 달려가 보니 그곳은 드라마·영화·뉴스에서 보던 처참한 실제 전쟁 현장이었다.
자신의 야전상의 내피를 벗어 지혈을 해주는 대원, 소리치며 의식을 잃어가는 전우를 부르는 대원 등 모두가 파편으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고 동시에 출혈이 심하였다. 대량전상자 처치법에 따라 즉각 처치하여야 하는 환자를 찾아 지혈을 하고 부상부위를 살펴보고 있을 때 다른 의무요원과 전투병들은 들것을 이용해 후송하였고 나와 거동이 가능한 일부환자는 마침 도착한 AMB를 이용하여 의무실로 향하였다.
다시 도착한 의무실에서는 모두가 바쁘게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고 항상 깨끗하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던 응급실은 한순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나와 같이 온 대원은 팔과 다리가 아프다고 하였는데 정확한 환부를 찾으며 군화를 벗겨보니 군화에 담겨있던 피가 쏟아졌고, 얼굴에 파편을 맞아 입술주위가 다 찢긴 환자도 있었다. 간단한 응급처치를 끝내고 환자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평소 부대TTT훈련으로 대량전상자처치법 연습을 지속적으로 실시한 우리 의무요원들은 의무실장님의(대위 김혜강) 지시에 따라 응급처치표를 작성하고 환자를 즉각, 지연, 최소, 기대로 구분함과 동시에 환자들을 좀 더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환자 인적사항 및 부상부위를 파악 중 또 다시 폭격이 시작되었고 우리 모두 엎드려 대피하던 중 대피하지 않고 들것에 눕혀있는 김영철 일병의 손을 붙잡고 있는 해병을 보게 되었다.
2차 폭격이 끝난 후 응급처치가 완료될 중 지휘통제실 및 상급 부대에 상황 관련 전화가 계속 왔고 또 다른 장소에서도 발생한 환자들이 지속적으로 후송 되어 왔다. 2차 폭격 당시 의무실 뒤편으로 불이 번져 유류고 쪽으로 불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몇 명 대원들은 소화기를 들고 불을 끄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그 뒤에 환자후송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최소처치환자를 뺀 나머지 모두를 안전하게 해군 2함대 의무대로 후송을 보낼 수 있었다.
몇 시간에 걸친 폭격과 환자 분류 및 처치, 후송을 겪고 난 의무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처참하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모습에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고 암담한 현실만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의 해군 해병대 연평부대 우리 모두는 최고였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군인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아들이었다.
■의무실 의무병 이병 윤성문
2010년 11월 23일 포 훈련을 하고 있던 중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고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것도 훈련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동기가 파편에 맞는 것을 보고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여기저기에서 포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 공포는 물 밀 듯이 나를 엄습했다.환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고 의무실로 돌아와 보니 의무실은 파편에 맞아서 유리창이 다 깨진 상태였다. 의무실로 들어가고 조금의 시간이 흘렀을 때 환자를 후송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환자를 후송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데 하늘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다가 내가 죽는 것은 아닐까’라는 공포가 한 번 더 밀려오고 심장이 어느 때보다 빨리 뛰기 시작했다. 환자가 있는데 도착하고 환자의 상태를 파악했다. 너무나 참혹했다. 여기저기에서 환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환자들의 신음소리는 나를 더 공포에 떨게 했지만 환자를 후송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포가 조금씩 사라졌다.
의무실에 환자를 후송하고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또 다시 2차 폭격이 이어졌고 의무실 사람들도 모두 엎드렸다. 계속되는 포격 속에 환자들에게 응급처치를 한다는 건 쉬운 게 아니었다.
환자를 수도병원으로 후송을 나섰다. 환자들은 RIB에 옮기고 해상전진기지를 거쳐 참수리호까지 옮기는 동안 연평도에서는 불이 섬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2함대에 도착하고 환자들을 헬기로 후송했다. 의무대원들은 헬기에 타지 못하고 버스로 수도병원까지 갔다.
모든 취재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병원에 들어가니 부상당한 대원들의 가족들이 응급실 앞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환자들의 부모님들과 친척들의 얼굴은 너무나 슬퍼보였다.
내가 너무 미안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부대원들의 빨간 명찰과 전투복을 보고 상황이 어땠냐며 묻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말에 대답을 해주고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몸에 힘이 빠져 축 늘어져 버렸다.
환자들을 입실시키고 연평도를 돌아왔을 때 의무실의 모습과 연평도의 모습은 참혹했다. 우리가 더 강해져야 북한이나 타 국가의 위협을 안 받고 우리 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는 하루였다. 타 부대에서 증원 부대가 오면서 복구 작업이 시작되고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마음이 조금씩 놓이기 시작했다.
■의무실 의무병 이병 강병욱
연평도에 입도한지 3개월이 지났다. 항상 평화롭기만 하였던 이 섬에 그날의 참사가 생길 줄은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이날은 부대에 포사격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당직을 보다가 한 꼬마 아이와 그 아이의 어머니가 진료를 받으러 왔다. 아이에게 처방된 약을 짓고 있는데 아이가 포 소리로 인해 무서워하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아름답고 좋은 소리가 아닌 섬뜩한 포 소리를 듣는 아이가 너무 안쓰러웠다. 아이에게 약을 주며 잘 가라고 인사를 한 뒤 당직을 다시 보았다.
그런데 14시 20분 경 갑자기 꽝하는 소리와 함께 의무실이 흔들리고 유리창이 깨졌다. 순간 나는 바로 방탄모를 쓰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그러는 사이 의무실 앞에 있는 건물에 포탄이 떨어졌고 그 파편과 진동으로 의무실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2층에서 입실환자 2명이 내려왔고 그제야 나는 내가 의무병인 걸 인식하고 우선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곧 치과 군의관님이 내려오시고 우리들을 방사선실로 대피시킨 뒤 우리들을 진정시키셨다.
포 소리가 잠잠해지자 갑자기 전화가 계속 울렸고 환자가 생겼다는 보고가 계속 왔다. 그 사이 간부들과 의무병들이 오고 환자가 왔다. 그 환자는 머리에 파편을 맞아 상처가 많이 깊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죽을 것 같다고 하며 환자는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우선 그의 상처를 세척하면서 그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의 상처를 지혈하였다.
그리고 故 문광욱 일병을 비롯한 많은 환자들이 의무실에 왔고, 의무실은 신음소리와 피로 가득 찼다. 지나가야 할 통로마다 환자로 가득 차 의료물품 전달은 잘되지 않았다. 실장님과 문세인 상병은 서로 번갈아가며 故 문광욱 일병에게 CPR을 실시하고 있었고 나머지 요원들은 다른 환자들에게 응급처치를 하였다. 나는 수액을 놓기 위해 환자에게 주사를 꽂으려 했지만 너무나 떨려 실패를 하였다.
옆에 계신 군의관님께서 대신 주사를 놓고 나는 마무리를 하였다. 발목에 파편이 박혀 발목이 휘고 상처가 깊은 한 해병의 신발을 벗겨 처치를 하려고 했는데 환자는 너무 고통스러워하였다. 신발을 벗기니 상처가 너무 심하여 얼른 상처 세척을 한 뒤 지혈을 하였다. 어떤 해병은 흉부에 생긴 상처에서 장기가 보였다. 그래서 얼른 보고를 하고 처치를 하였다.
환자를 처치하는 동안 2차 포격이 시작되었다. 정말 무서웠다. 모두들 처치를 중단하고 책상과 의자 밑으로 숨었다. 살고 싶었다. 하지만 환자를 살려야만 했다. 북한이 포를 쏜다고 모두 대피하라는 방송이 들려 왔지만 모두들 방송을 무시한 채 환자를 처치하였다.
의무 물자가 떨어지자 물자를 옮기기 위해 1, 2층을 왔다 갔다 거렸다. 언제 포탄이 떨어질 줄 몰라 두려웠지만 잠깐 이었다. 의무물자를 전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다 의식을 잃고 죽어가는 문광욱 일병을 보았다. 그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두려웠다. 몸 색깔이 파랗게 변해가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기가 두려웠다.
환자 후송을 위해 의무실 밖에 있던 창고에서 들것을 들고 와야 했다. 정말 밖에 나가기가 싫었지만 발은 벌써 창고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들것을 들고 의무실로 돌아오는데 몸이 무거워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언제 포탄이 내 옆으로 떨어질 줄 몰라 들것을 버리고 의무실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환자들을 포기하기 싫었다. 들것을 옮기고 문광욱 일병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정말 화가 났다. 북한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한 인생을 빼앗아 가는지 도대체 왜 이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공포와 불안에 떨게 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잘못 했고 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환자 후송이 시작되었다. 4인조로 들것에 환자를 올려 AMB에 환자를 옮겼다. 피 범벅이 된 AMB는 배터로 후송을 하러 갔고 그사이 환자를 재정렬 하고 군의관님들은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깁스를 씌우기도 하고 파편을 빼기도 하였다. 그리고 모든 환자들에게 항생제를 한방씩 놓았다. 후송을 갔던 AMB가 돌아오고 2차 후송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故 문광욱 일병의 시신도 후송 되었다. 그를 AMB에 싣는 동안 정말 죄송하였다 살리지 못해서 차갑고 파랗게 변한 그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펑하는 소리가 들렸다. 의무실 옆 건물인 교육대의 연료탱크가 터지고 교육대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우리는 바로 가지고 있던 소화기를 모두 모아 주위의 불을 진화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환자를 후송한 뒤 일은 일단락되었다.
하늘은 연기 때문에 어두웠고 해는 저물어 갔다. 모두 지쳐있었다. 전부 앉아 뻗어있었다. 연평도는 언제 포탄이 떨어졌냐는 둥 고요하였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 공기는 화약 냄새와 연기로 인해 목이 따가울 정도로 매캐했다. 나는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연평도를 보았다. 그때 보았던 연평도는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불타는 연평도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얼마나 잘못하였기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다치고 공포에 떨어야 했는지 우리는 그들을 위해 쌀과 비료와 소 등을 보내 주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려받은 건 수십 발의 포탄이 아니다. 수많은 생명과 아름다운 연평도 그리고 대한민국의 평화를 빼앗아 갔다.
■군종과장(목사) 대위 하승원
굉음이 울리고 눈앞에서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마을에서 연기가 올라왔고, 시선이 닿는 곳곳에 탄흔이 보였습니다. 급히 올라간 의무실은 이미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아이들이 누워있었습니다. 복도에는 아이들이 흘린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응급실 안쪽에는 서서히 숨이 멎어가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피로 얼룩진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었지만, 아이의 숨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들, 곧이어 추위와 불안함에 쌓여있는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시간이 지나도 지혈이 되지 않아 피가 계속해서 흘러도, 오히려 저를 보며 웃어주는 해병의 모습에 얼마나 제 자신이 무능력한지 깨달았습니다. 두 명의 전사자. 그 중에 한명은 연평도에 와 처음으로 상담과 기도를 해주었던, 매주 인사하며 장난치고 함께 예배드리던 아이였고, 한명은 제 눈앞에서 숨을 멈추었습니다.
군종장교. 군인이며 종교인인, 그러나 종교인과 군인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혼란스러워 하는 존재. 포격사건이 있은 후, 쉬지 않고 아이들을 만나고, 위문품을 전달하고 무언가를 하지만, 정말 제가 이들에게 힘이 되는 지, 알 수 없었습니다. 21명 중 1명이 죽고 5명이 다쳤던 정비소대에 처음 찾아갔을 때, 그들의 눈을 보며 저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힘내자는 말을 횡설수설 하듯이 하고 나오는데, 그들의 눈이 잊혀지질 않았습니다. 마음이 너무 다시 올라갔습니다. “내가 기도해줘도 될까?..” 조심스레 기도하고 눈을 떴을 때, 눈물을 흘리는 해병을 봤습니다.
아직도 귀에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아이들의 눈빛이 잊혀 지지 않고 눈만 감으면 의무실 찬 바닥에 누워서 웃으며 저를 바라보던 해병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저는 솔직히 이 곳 연평도가 처음 겪는 군대입니다. 그래서 잘 모르는 것도 많고, 눈치도 없고, 군이 어떤 지 잘 모릅니다. 할 말 안할 말이 어떤 것인지 조차, 잘 모르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입니다.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는 군종장교의 역할을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부대원들이 다치지 않길 바라고, 그들이 마음이 다치질 않길 바라고 몸이 건강하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만나고 이야기하고 들어주고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고 싶고,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통해서 군종장교 또한 군인이라는 사실을 크게 느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군종장교 또한 부대와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서 훈련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본부중대 행정관 상사 한훈석
‘10. 11. 23. 화요일 14시 35분 청명한 초겨울 하늘에 검은 흉악한 포물선이 그려지고 서해5도 중 가장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연평도가 무간지옥과 다를 바 없는 아비규환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이 날은 해상 사격훈련이 있는 날이라 대원들에게 거점작전에 대하여 교육을 하고 난 뒤 행정병과 함께 중대 건물로 내려와 서류를 챙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귀에 익숙한 포성과 함께 임시건물인 컨테이너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K-9사격이 있을 때면 으레 있는 일이였기에 “행정관님, 오늘 7중대가 어마어마하게 때려 붓는 것 같습니다”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너스레를 떠는 행정병에게 실소를 띄며 서류를 들고 부대본관으로 출발하려 하는 도중이었다.
햇살이 부서지는 연평도 바다를 창가로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서 연기가 보여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상황병에게 물어보려 하는 순간 대기를 찢어발기는 굉음이 들리고 컨테이너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즉시 상황병에게 상황실을 폐쇄할 것을 지시하고 행정병과 상황병을 이끌고 소산진지로 향하였다.
잠시 승파관 벽에 기대어 상황을 판단하며 마을을 둘러 본 순간 중대를 벗어날 때만 하여도 설마 하였던 일이 벌어졌다. 아름다운 우리의 연평도가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화마에 휩싸이고 있었던 것이다. 동서남북 할 것 없이 눈이 가는 모든 곳에는 잿빛연기가 하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상황이 정확하게 파악되고 나니, 반드시 대원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급히 발길을 거점진지로 돌려 이동하는 와중에 부대본관에 들러 아직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업무를 보고 있는 참모부서 간부들에게 상황을 알려 모두 거점으로 이동할 것을 전파하고 나서 다시 거점까지 질주 하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철모 위로 들리는 포탄소리는 당장이라도 등 뒤에 떨어져 나와 대원 두 명을 덮칠 것 같았기에, 나만 믿고 따라오는 대원들이 있었기에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의지로 이끌어 모두가 무사히 소산하였다.
거점입구에 도착하여 한숨 돌린 순간 등 뒤로 들리는 폭음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불과 5분전까지 내가 있었던 승파관에 포탄이 떨어져 있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의 판단이 조금만 늦었어도 나의 목숨뿐만 아니라 대원 두 명을 부모님의 곁으로 돌려보내지 못할 뻔한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겼음에 평소 신을 믿지 않는 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신이 존재함에 감사를 드렸다.
아직도 쿵! 쿵! 울리는 폭음이 뇌에 꼽혀서 빠지지 않았는지 심장소리처럼 계속 귀에서 울렸다. 먼지와 섞인 방사포 연기가 하늘을 덮어 구름을 삭제 시켰다. 참담했다. 거점에 앉아 생각을 했다. 진짜 전쟁이 일어나나 하지만 나는 싸울 것이고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앉아 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2차 사격이 시작 됐고 거점이 심장박동처럼 계속 울렸다. 중대원들은 크게 동요 했지만 간부들의 지시로 안정을 찾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19시경 마을의 화재를 진압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나는 제독차의 물로 마을의 화재를 진압하고자 하는데 나는 자원을 했고 급수장에서 물을 채운 뒤 마을로 갔다.
포를 맞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없었고 거리는 하늘을 향해 치솟는 불길만이 우리를 반겼다. 화염을 향해 제독차의 살포총이 갔다. 마을에 맞은 포와 그 위에서 사는 화염 그리고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 애쓰는 분대원들이 겹쳐졌다.
벽이 허물어지고 곳곳에 불이 번졌는데 소방차가 1차적으로 많이 꺼놓은 상태에서도 우리는 계속 불을 껐다. 마을을 향해 방사포를 던진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끓어오르기도 24시가 넘어 하루가 지나갔다. 하루가 참 길었고 거점으로 돌아오는 길은 짧았다. 하루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달이 점점 낮아지는 모습을 봤다. 연평도의 수많은 별들이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듯 했다.
나는 담배를 태우며 하늘로 향하는 연기 속에서 14시 34분에 떨어진 포의 자취를 볼 수 있었다. 내 두 눈에 박혀있는 2010년 11월 23일은 계속 정지 한 채 두 눈에서 잠자고 있다. 하루를 맞이하는 태양을 보며 북한의 도발에 대해 생각을 한다. 우리는 지지 않았다. 그 때를 지우는 일은 내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본부중대 인사병 병장 백종협
2010년 11월 23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시30분 총기상과 동시에 조별과업 정렬을 떠났다. 간단한 인원 파악 및 국군도수체조, 조별과업을 부여받고 해산을 한 뒤 근무표를 확인했는데, 근무표를 보니 13시 ~16시까지 주간 3직 근무였다. 오늘 14시에 대 해상사격훈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훈련에 참가 하지 못하는 마음 한구석에는 꺼림칙함이 있었다.점심을 먹고 난 뒤 난 근무 준비를 하고 중대원들은 방탄복을 준비하고 무장을 몸에 맞게 최적을 하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13시 근무 진입 후, 후임병인 김태우 해병과 평소와 같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 때, 14시 35분 헬기장에서 ‘씨~웅 꽝’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무슨 소리지” 하고 그 방향을 쳐다보았다. “포 7중대의 K-9 자주포 사격이 왜 이렇게 크고, 큰 진동으로 느껴질까”라고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마을에서 포탄 소리가 2회 들렸다. 흰 연기가 무섭게 피워 오르고 있었다.
나는 선임근무자로서 후임 근무자를 이끌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김태우 상병과 함께 배수로 달려가 몸을 피했다. 배수로 들어가 있는데, 폭음과 충격파에 대비해 중대에서 교육받은 복지부동 자세를 취했다.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위병소 배수로 바로 옆 탄약반에서 ‘꽝’하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배수로에는 진동이 울리면서 위병소 창문이 깨지고, 내가 엎드리고 있는 머리 위로 총알 같은 파편이 흩어졌다. 나는 가슴이 뛰고 순간적으로. “아! 전쟁이 났구나!, 도대체 어디서 날라 온 포탄인가!, 포탄은 언제까지 떨어지는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 나는 절대 저 포탄에 맞지 않는다!”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배수로 바닥에는 전투복과, 얼굴이 젖어 들 만큼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폭음 소리가 멈춘 뒤 나는 위병소 전화기로 중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전화기는 먹통이었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거점으로 가는 도중 중대 들릴 생각을 했다. 그리고 김태우 상병에게 긴장 하지 말고, 침착하자며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재차 말하고 중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뛰어갔다.
사실 김태우 상병보다 내가 더 겁에 질려 나 자신의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이렇게 격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중대로 가니 이미 중대는 소산을 마치고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중대의 잔류인원을 다시 확인하고 혹시나 있을 화재에 대비하여 김태우 상병과 함께 중대의 차단기를 모두 내렸다.
그 순간, 나는 중대로 뛰어오는 중 탄약반 주위에 불길이 번지기 시작 했다는 것이 떠올랐다.김태우 상병과 나는 포탄이 떨어질까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불길을 그냥 방치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죽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소화기를 들고 불이 번지기 시작한 탄약반으로 달려갔다. 탄약반 앞에서 소화기를 뽑고 진화를 시작했다.
초기 진압을 하는 도중 옆에서 소화기를 들고 목사님이 달려오셨다. 두려움을 안고 있던 나는 목사님이 오시자 마음이 안정되고 자신감이 생겼다. 화재를 진화한 후, 거점으로 뛰는 도중 나는 내 뺨을 때리면서 마음속으로 “정신 차려야 한다”며 계속 되새겼다.
거점으로 들어가니 마침 중대장님과 행정관님이 위병소 근무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이상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살아있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렇게 나를 신경 써주고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15시 20분경 북한의 2차 포격이 시작되었다. 거점 입구와 가까이 있던 중대는 거점 안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거점 안에서 지진과 같은 진동이 울렸다. 나는 거점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었고, 후임들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나 또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중대의 선임병으로서 겁에 질린 표정을 보이게 된다면 후임들에게 좋지 않다고 판단해 오히려 후임들에게“걱정하지 말라며, 이 상황에서 살아남게 되면 우리는 영웅이 될 꺼라고, 북한군과 한번 싸워 멋지게 영웅이 되자”고 후임들을 격려 했다.
그 뒤 몇 시간동안 더 이상의 포격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적의 포격이 멎자, 부대본부 주위가불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중대장님은 선임병 몇 명을 뽑아, 밑으로 내려가서 모든 소화기, 등짐펌프, 물수건, 방화벨트 구성하기 위한 삽과 대비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방화벨트를 구성할 곳은 지금 연평부대에서 제일 중요한 지휘통제실 주위, 거점, 거점 발전기였고, 불을 끄지 않는다면, 모든 곳에 불이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와 몇몇 인원들은 중대장님의 지시를 받아 지통실 주위에 삽과 대비, 등짐펌프로 지통실과 거점 발전기로 더 이상 불이 넘어 오지 못하게 방화벨트를 만들었다.
주요 시설물 주위 3m를 삽과 대비로 나뭇가지, 잎들을 제거 하고 그 주위에 등짐펌프로 물을 뿌려서 완벽한 방화벨트를 만들었고, 불이 번져 오는 곳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불을 껐다. 큰 불을 거의 끈 뒤에도 혹시나 불씨가 다시 살아나 불이 다시 번질까봐 2시간 동안이나 지켜보며, 다시 살아나는 불씨들을 제거했다. 화재를 진화하고 거점으로 들어가니 22시가 지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중대 총원은 밖에서 고생하는 대원들을 생각하며 행정관님을 비롯하여 총원이 식사를 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정말 위급할 때야 말로 전우애가 최고조에 오른다는 것이 사뭇 느껴졌다.
다음날 새벽 위병소 근무에 임하게 되었다. 근무 중, ‘피~웅’이란 소리만 들어도 후임근무자와 정색을 한 뒤, 북쪽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고 포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하지만 적의 예기치 못한 도발에도 해병으로서, 연평부대원으로서, 본부중대원으로서의 내 자부심과 이 나라를 내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은 흔들림이 없다.
난 오늘도 주어진 임무들이 내 전우와 나라를 지킨다는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11월 23일 뜨거웠던 그날을 떠올리며, 내가 가졌던 생각과 마음들을 뼛속 깊이 새기고, 적의 어떠한 도발에도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인사과 일보담당 중사 안준오
뒤돌아보면 마땅히 기여한 바도 없으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준 인사과 간부들에게 감사하고 교훈으로 간직하고자 수기를 기록합니다.우리 연평부대 인사과는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각자가 맡은 임무의 수행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인사과장과 관사담당은 군 주택 시설물 확인을 위해 마을 인근에 산재 해 있는 군 주택 시설물 점검을, 보임담당은 사격훈련 관측 업무를, 출도담당은 선착장에서 휴가자 통제 중에 있었으며 행정담당은 22일 휴가를 출발하였으나 늦은 시간 인천에 도착하여 23일 고향으로 향하였다. 각종 감사 자료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멀리 당섬 선착장에는평소처럼 여객선이 입항하고 있었다. 평화롭고 소박한 섬마을의 풍경은 그때까지였다.
멀리서 포사격을 하는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슝”하는 소리와 함께 헬기장 부근에 포격이 가해졌다 그 순간 머릿속은‘혹시 오발인가’최소사거리? 고각의 최대화? 앞뒤가 맞지 않았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는 찰라 마을과 부대시설 주변으로 연속적으로 적 포탄이 떨어졌다. 도발이 가해지고 있음을 확신하고 근무담당과 제2회의실 주변의 인원들을 대피시설로 이동시키며 달려가 인근 대피소 총안구를 통해 주변을 관측하였다.
그 시각 임무수행을 마치고 복귀 중이던 인사과장과 관사담당은 포격이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민간인 보호를 위해 어린이집의 어린이들과 교사, 길거리에서 공황상태에 빠진 주민 및 어린이 등 수 십여 명을 대피시설로 이동시켰고, 출도담당은 선착장에서 휴가대기자를 버스 승차책임자에게 인계하여 각 부대로 복귀시키고 지통실로 돌아 왔다.
그 자리에서 우리 팀은 급히 임무를 분담했다. 우리의 임무는 전투행위가 아니라 적 공격으로부터 주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근무담당이 먼저 도착한 버스로 출발했고 나는 혼자 주차장 주변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 1차 포격으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사 박용철을 또 다시 포격이 가해질지 모르니 대피호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였다.
잠시 후 버스 도착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주차장에 나와선 순간 또 다시“슝”하는 소리가 들려 건물 안으로 몸을 피하는 동시에 부부대장실 쪽으로 떨어진 포탄에 의한 파편더미가 건물 속으로 쏟아져들어 왔다
파편 가루가 채 가라안기도 전 본관 앞으로 선착장 업무를 마친 출도담당의 차에서 내린 헌병근무자를 불러 건물 내부로 대피 후 또 다시 포탄이 본관 주변에 떨어졌다.
잠시 뒤 포격은 멈추었고 소강상태인 것으로 예상한 나는 버스가 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판단하고 먼저 출발하여 주민과 연평어린이집 대피를 담당한 중사 정용균에게 연평 초등학교도 확인해줄 것을 요청하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불통인걸을 확인, 건물 밖으로 나와 문자 메시지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고 헌병근무자와 지통실로 이동 헌병대장에게 신변을 인계한 후 전시업무로 전환 피해현황 및 사상자 파악에 나섰고 그러면서 부대의 피해상황이 속속 확인되었다.
전·사상자 가운데 故 서정우 하사는 22일 환한 웃음으로 만난 기억이 있어 너무도 가슴이 저려 왔다. 잠시 후 또다시 포격이 가해져왔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임무수행을 위해 쏟아지는 포탄사이를 거침없이 달렸다.
연평도 적 포격은 이렇게 지나갔고 그날 저녁에도 우리 인사과는 조를 나누어 대피시설에 있는 주민들의 안전과 인원수를 확인하고 긴급물자를 지원토록 부대에 건의 지원하였다.
그날 밤 대부분의 주민들이 지원에 나선 병원선, 해경정 및 개인선박을 이용해 섬을 빠져나갔다. 24일 인사과 간부들은 부대 통제에 따라 남아있던 민간인 170여명을 개인 차량 및 부대차량을 이용하여 선착장으로 이송하여 해군함정에 탑승시켜 인천으로 대피시켰다. 이때의 상황은 마치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다행이 휴가 중이던 행정담당이 인천항에서 주민들을 안전하게 안내하여 임시 대피소로 이동하였다.
혹시 몸이 불편하거나 대피소식을 듣지 못해 마을에 남아있을 주민들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불이 켜진 건물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추가도발에 대비하였다. 그 이후로도 사실상 치안공백상태에 빠진 마을 및 군 시설을 중심으로 순찰을 실시하는 등 임무를 이어나갔다.
연평어린이집 유아들과 수 십 여명의 민간인을 대비시킨 인사과장과 관사담당, 적 포격 순간에도 관측소를 점령하여 임무를 수행한 보임담당, 민간인의 대피계획을 실천한 근무담당, 선착장의 동요를 막고 휴가자를 포함한 민간인을 대비시켰던 출도담당, 연평도 적 포격 소식을 듣고 고향땅을 밟아 보지도 못한 채 휴게소에서 다른 차와 미래해운 선박을 이용 복귀한 행정담당 이들의 질주가 있었기에 피해현황파악, 민간의 안전, 육지로의 안전한 철수, 빠른 안정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곳곳에서 많은 연평부대원이 강한 동료애와 근성을 보여주었으나 사기를 드높여야할 순간에 잘잘못을 논하는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포격의 순간에 최소한 자신의 안녕을 위해 자세를 숙이지는 않았다.”
전투현장에는 사기충천한 연평부대원이, 불타는 마을에는 인사과 팀이 달리고 있었다.
■포7중대 기상반장 중사 신 용 한
2010년 11월 23일. 날씨는 어느 날보다 좋았다. 난 오늘도 평상시와 동일하게 보급업무를 수행하고 오후에 있을 중대 ATT평가 사격 통제관으로써 탄종, 신관, 장약, 발수를 확인한 후 사격 시 15분전에 3포상으로 이동하여 사격준비 상태 및 3포 인원들에게 장비 이상 유무와 안전 교육을 실시한 후 중대 ATT마지막 사격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한 후 3포 2번 포수인 김진혁 일병과 포상 후면으로 이동하여 사격대기를 하고 사격 시 한발 한발 체크를 하고 마지막 발수 사격을 한 후 포반장에게 장비 이상 유무와 뇌관, 들기고리를 확인 후 반납 하라고 지시하였다.이동 전 갑자기 격발기에 이상이 있다며 넷 포 불발이라고 96K로 송신되어 무슨 일인가 하여 넷 포로 이동하는 중 2분 후 맑은 하늘에서 쉬~우~웅 소리가 가까이 들리며 3포상 정면에 둥~!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하나포상, 병사 쪽에서도 둥~! 펑~! 하는 소리와 연기가 나기 시작하고 5초 후에 66고지 능선에 여러 발의 적탄이 떨어졌다. 난 순간 적 폭격이라고 생각하여 주위를 둘러보고 주위에 사진을 찍고 있던 정훈하사를 데리고 넷 포상 환풍구 쪽으로 들어가 대피하고 있었다. 얼마 후 정훈하사가 정훈관이 넷포상 위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난 다시 확인 하기위해 바깥쪽으로 나와 확인을 하였지만 정훈관은 없었다. 적탄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난 정훈하사와 둘포상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K-10 포상에서 정훈관이 보여 정훈하사를 정훈관에게 가라고 지시하고 난 기상반으로 이동하였다. 도착 후 기상병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난 다시 정비반으로 이동하였다. 몇 몇 대원들이 있었다. 그 후 중대장이 96K로 대원들을 통제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난 인원들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시 적탄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제 마을 쪽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적탄에 피격당한 하나포상에는 화재가 발생하였지만 적탄 때문에 이동할 수가 없었다. 몇 분이 지나자 사격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나포상에는 엄청난 화재가 발생중이였다. 난 박진관해병과 기상반에 있는 소화기를 들고 하나포상으로 이동하여 화재진압을 시도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정비반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얼마 후 중대장이 적탄으로 전기가 차단되어 발전기를 가동 중인데 유류보급을 지시하여 박진관 해병과 다시 유류탱크로 이동하여 휘발유를 들고 상황실에 휘발유를 건내주고 다시 정비반으로 이동하여 중대원, 간부들과 하나포상 화재진압을 하였다. 이번 연평도 폭격과 피격을 당하여도 열심히 싸워준 우리 대한민국 대표 K-9중대 총원에게 감사하고 자랑스럽다. 영원한 포7중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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